언론유감

그 해 유월, 경향신문은 왜 불탔는가

olddj 2007. 6. 11. 03:41

규명없는 참회

  경향신문은 지난 2월 3일자 <역사적 과오의 규명과 참회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사설을 통해 진실화해위의 ‘긴급조치 판사’ 명단 공개를 둘러싼 논란을 비판하며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긴급조치 시대의 언론’도 역사적 과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독재체제를 강화한 유신정권이나, 이를 ‘법치’의 이름으로 지탱해준 법원·검찰·경찰을 비판·질타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경한 목소리로 ‘불온세력 척결’을 강조하기 일쑤였다. 언론은 그 어떤 권력기관 못지 않게 유신정권 유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셈이다. 경향신문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수차에 걸쳐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반성한 바 있다. 이번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유신시절을 포함해 군사독재정권 시절 내내 언론 본연의 소명과 책무를 다하지 못했던 점을 통렬히 뉘우치고 국민과 독자들께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사설은 <미디어오늘>  인터넷판 2월 5일자 온라인 기자칼럼 "경향 '과거사 반성'이 돋보이는 이유"를 통해서 다른 신문들과 비교되며 높은 평가를 받았고, 2월 7일자 온라인 <기자협회보> “긴급조치, 언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기사에도 언급되었다. 2월 16일자 자사 지면의 <옴부즈만> 칼럼을 통하여도 또 한번  과거청산의 중요성과 함께 거론되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이 사설은 아래와 같이 결론 맺고 있다.

  "진실화해위가 ‘긴급조치 판사’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경향신문이 ‘긴급조치 검사’들의 면면을 보도하는 까닭은 결코 특정인을 비방·음해하거나 지난날의 케케묵은 그늘을 들추어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 같은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두 번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만에 하나 그런 불의가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규범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익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역사적 과오의 처벌에는 공소시효가 있으나 과오의 규명, 참회와 사죄에는 시효가 없다."

 그런데 자꾸만 뭔가 하나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법원에 ‘긴급조치 판사’가 있고 검찰에 ‘긴급조치 검사’가 있다면 당연히 언론사에도 기사나 사설을 썼던  (오히려 더욱 강경한 목소리로 ‘불온세력 척결’을 강조한)'긴급조치 언론인'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서 찾아 보아야 할 지 모르겠다. 너나할 것 없이 다 그랬다면 당시 근무했던 사람들의 명단 전부를 공개하고 나서 독자들의 용서를 구할 일이다. 경향신문의 경우에는 '규명없이 참회'만 하는 격이다. 이거야말로 사설의 내용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경향신문>은 6월을 맞아 8일과 9일의 기획 [6월혁명 20년, 민주화 20년]을 통해 6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한편으로 가상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가증스럽다. 그때 경향신문은 무엇을 했던가. 지금의 <조중동>은  저리가라였다. 즉, 80년대에 관한 한 그리고 6월 항쟁에 관한한 조중동보다 몇 배나 욕을 얻어먹어 싼 신문이다.

 경향신문 (석간) 1987년 6월 10일 1면 http://www.kinds.or.kr/imgdata8/1987/06/10/19870610KHM01.pdf

경향신문은 10일에 실렸던 민정당 전당대회 사진에 이어 전두환의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11일 판에도 집어 넣었다. 10일 오전에 한 행사의 사진을 10일 석간에도 넣고 11일 석간에도 넣었다는 말이다.

경향신문 (석간) 1987년 6월 11일 1면 http://www.kinds.or.kr/imgdata8/1987/06/11/19870611KHM01.pdf

조선일보 (조간) 1987년 6월 11일 1면
중앙일보 (석간) 1987년 6월 10일 1면
동아일보 (석간) 1987년 6월 10일 1면

 이러한 경향신문의 (현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좃선스러움때문에 6월 18일에는 아래와 같은 일이 있기도 하였다.

"6월18일 저녁 9시쯤 서울역 앞에서는 부산·경남 지역으로 발송되던 경향신문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시민들이 발송 차량에 실려 있던 신문 4만3000여부를 역 광장으로 끌어내 불태워버린 것이다. 언론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준엄한 심판이자 경고였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보도지침’에 안주해온 직무유기의 당연한 귀결임을 반성하며 사실과 양심의 보도를 천명하고 나섰다. 4∼6기를 중심으로 몇 주에 걸쳐 이루어지던 성명 발표 논의에 이동주 기자 등 선배 기자들 일부가 추가로 참여했다. 성명이 발표되자 경향신문 편집국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동주 기자가 이날 아침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자 회사 쪽 간부들이 달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은 김지영 기자가 대신 낭독을 마친 성명이다.

 “한국 언론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시민에 의한 신문의 대량 소각은 대중이 등을 돌려버린 우리 신문의 현 위치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제작 일선에 있는 우리는 벼랑 끝에 섰다는 절박함과 함께 우리 자신이 불탄 듯한 아픔을 느낀다. 이번 사태는 근본적으로 사실 보도를 외면해 온 제도권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최근 이 땅의 고질화된 제도언론의 질곡이 극에 달했음을 지적한 독자의 선언이며 최후 통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과 양심에 따른 보도만이 우리의 길임을 천명한다.”
(<미디어오늘> 5월 31일자 “신문 소각, 우리 자신이 불탄 듯한 아픔”)

 참회도 중요하지만 규명은 더욱 중요하다. 그 성명서에 서명을 한 기자들은 누구이며, 현재는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명단과 성명서를 낭독할 때 달려든 회사 간부의 면면은 누구인지 경향신문의 지면을 통해 밝히고  `87년 6월을 정리하고 참회하는 게 옳다고 본다.


'재벌신문'의 과거는 덮어도 좋은가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언론이 얼마나 철저하게 한 개인의 방패막이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며, '사회의 목탁'이니 '무관의 제왕'이니 하는 기자들이 사실은 얼마나 철저하게 재벌의 사병(私兵)으로 복무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언론 개혁의 절박성을 제기해 보자는 것이었다."(윤덕한 장편소설<개혁의 무풍지대 '재벌신문'> '첫 머리에', 1995)

 경향신문은 1990년 8월에 한화그룹에 인수되었다. 이후 1998년 한화그룹으로부터 분리, 국내 첫 사원주주회사로 출범하였다. 경향신문은 이 시기도 문제다. 이 시기의 경향신문은 규명하고 참회해야 할 것이 없느냐는 것이다. 즉, 재벌 사주에 의해 어떤 휘둘림을 받아 언론의 본령을 지키지 못했는지, 돈의 힘에 의해 휘어진 붓을 휘두른 적은 없었는지…. 그러한 일들 중 언론개혁이라는 대의와 미래 발판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규명하고 참회해야 할 것은 없는지…. 왜 경향신문에게만 그러냐고? 그래야 지난 2월 3일자 사설의 논리가 제대로 설 것이 아닌가.


'참회'라는 화장빨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참회하는 것은 또 다른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반성하는 것은 언론개혁이나 과거청산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본질을 왜곡할 뿐더러 스스로 이중성만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조폭 팔뚝에 새겨진 '차카게 살자'를 보는 것 같이 역겨울 뿐이다.

 87년 6월 경향신문의 일부 기자들이 성명에 쓴 "사실과 양심에 따른 보도만이 우리의 길임을 천명한다"는 지금 지켜지고 있는가. 아니다. 경향신문은 지금도 힘있는 편에 줄을 서고 있다. 안타깝게도 전통은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반성과 참회'까지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신문의 천박함에 다시 한 번 분노한다.


 "특정인을 비방·음해하거나 지난날의 케케묵은 그늘을 들추어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 같은 광기와 야만의 시대를 두 번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만에 하나 그런 불의가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규범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익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이 말은 언론에도, 경향신문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