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라면 사재기 열풍과 같은 현상이 없어졌음을 들어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가 멀어졌음을 자랑스러워하였다. 노무현은 기본 인식에서 이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615와 1004의 성과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노무현이 김정일을 만나고 온 직후에 지지율이 겁나게 상승했던 것은 참으로 국민들의 생각을 알게 해 주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과거 김대중 때도 마찬가지고.
기본적으로 919나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단속적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을 가한 것은 미국 네오콘세력과 일본 극우세력, 우리나라 뉴라이트 계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반도, 특히 남한의 태평성대를 훼방하는 세력들이다. 따지고 보면 한 줌도 안된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난 아는 사람들에게 ‘태평성대’를 이야기하곤 했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 서로 부닥쳐도 서로 대화나 타협의 여지는 남길 줄 알았고, 이해의 공간을 넓게하는 여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리더를 중심으로 한 운신의 공간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는 노무현 정권에서 더 넓어지고 커졌다. 경험에 의하면 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들부터가 자신이 가지는 조정기능에 보람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경청하고 토론을 할 줄 알았으며, 적절한 중간 지점을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았다. 정치보복을 모르는 우리 순둥이 초대, 2대 대통령 덕에 난 나름의 태평성대를 족히 누렸다.
두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가.
앞으로의 태평성대는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에 달려 있다.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되는 이명박이 숟가락 얹기를 주저하는 모습에서, 난 우리의 할 일을 본다. 지금은 요순시대가 아니다.
‘의식이 풍족해야 예의를 안다’고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 명제는 틀렸다. 그 대우인 ‘예의를 알면 의식이 풍족하다’라는 명제가 참이지 않기 때문이다.
(추기 2009. 8. 25 13:00) 앗, ‘의식이 풍족하면 예의를 안다’의 대우는 ‘예의를 모르는 놈은 의식이 풍족하지 않다’이다. 내가 말하려한 의미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