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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중앙일보>는 40년간 '삼성그룹 사보'였다

olddj 2005. 7. 26. 17:00
<중앙일보>는 40년간 '삼성그룹 사보'였다
[오마이뉴스 2005-07-26 16:56] 김주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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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9월 22일자 <중앙일보> 창간호.



‘재벌신문’ <중앙일보>의 태생적 한계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최근 공개된 '삼성 X파일'에 따르면 1997년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현 주미대사)이 이학수 삼성그룹 비서실장(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과 정치자금 액수 및 전달방법을 논의하고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문제를 놓고 정치권과 중재역할을 자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언론사주가 재벌그룹의 정치자금 ‘택배회사’ 노릇을 하고 정치권의 ‘정보원’ 역할을 했다는 데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중앙일보가 최근 들어 갑자기 삼성그룹 등 재벌의 편을 들거나 특정 정파의 이해를 위해 지면을 사유화한 것은 아니다. 창간 당시부터 소속 재벌인 삼성그룹을 보호하기 위한 외곽단체라는 의혹을 받았으며 삼성관련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삼성그룹 ‘사보’로서 기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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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카린 밀수 사건을 폭로한 <경향>1966년 9월 15일 기사(왼쪽)와 이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라고 보도한 <중앙>의 9월16일자 기사.



고 이병철 삼성 회장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은 없을까"

중앙일보는 1965년 9월 22일 창간 이후 삼성그룹의 나팔수 역할을 해왔으며 철저하게 삼성을 비호하는 논조를 펼쳐왔다. 특히 ‘한국비료 사카린밀수사건’ ‘용인자연농원(현 삼성에버랜드) 돼지분뇨 방류사건’ ‘삼성조선 시추선 설계도면 절취사건’ 등 삼성그룹이 각종 비리 의혹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삼성그룹을 비호하는데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내 첫 ‘재벌신문’인 중앙일보는 정치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병철(작고) 삼성그룹 회장이 직접 만들었다. 1986년 출판된 이병철 회장의 전기 <호암자전>은 중앙일보의 창간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며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어쩌면 홍석현 중앙일보 전 사장이 1997년 정치자금을 직접 전달하고 중앙일보 간부들이 특정 대선후보 자문역을 담당한 것도 이병철 회장의 ‘정치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려는 창간정신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앙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삼성그룹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물량공세를 폈다. 무가지를 총 발행부수의 27%까지 늘리고 1967년 국내 초고속 윤전기 8대 가운데 5대를 보유하는 자본력을 뽐냈다.

설립 뒤 5년간 적자를 내면서도 판매경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도 삼성그룹의 자본력이었다. 더구나 창간 후 일정기간 무가지에 경품까지 붙여 판매함으로써 기존 판매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 때문에 중앙일보는 한국신문협회 판매협의회로부터 여러 차례 징계를 받았다. 중앙일보가 지금 같은 사세를 이루게 된 것도 1990년대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으로부터 엄청난 자금지원을 통한 부수확장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국내 첫 '재벌신문'... 삼성그룹 나팔수

재벌신문의 폐해에 대한 우려는 1년도 못 돼 현실로 드러났다. 1966년 5월 24일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이 경남 울산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원료인 OTSA 1403포대(시가 약 1800만원 상당)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 해 6월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만원을 부과했다.

사카린은 값이 비싼 설탕 대신 식료품의 단맛을 내는 데 쓰이던 원료였으나 이후 발암물질로 판정돼 사용이 금지됐다. 삼성그룹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000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국내 굴지의 재벌 삼성이 사카린을 밀수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회적 충격을 불러왔다.

당시 밀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까지 만들어 밀수범에게 사형을 선고할 만큼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특히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환 의원은 9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밀수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라며 “사카린을 피고인들에게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인분을 국무위원들에게 뿌려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의 첫 보도로 사카린 밀수사건이 폭로됐다. 경향신문은 중앙일보가 창간되기 1년여 전인 1964년 2월 1일 「폭리의혹 점차 확대」라는 제목의 1면 머릿기사를 통해 삼분폭리사건과 삼성재벌의 국가경제 파괴행위에 따른 경제의혹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 삼성그룹과 법정다툼을 벌였다. ‘삼분폭리’란 5.16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전후한 혼란기를 틈타 몇몇 재벌이 ‘설탕, 밀가루, 시멘트’(三粉)를 에워싼 모리행위를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삼성그룹은 경향신문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과 신용훼손, 상습협박 등의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고 경향신문은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등 12명을 상대로 맞고소했다. 검찰은 경향측 고소는 각하하고 삼성측 고소에 따라 경향신문 사장 등을 불구속 기소했다. 경향신문이 피소된 상태에서도 연일 삼분폭리 사건을 파헤치자 삼성은 경향의 부동산과 유체동산의 가압류신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삼성은 가압류신청은 취하하고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소송은 그대로 두어 3년 이상 30여 차례 공판이 열렸다. 삼성은 1967년 4월 22일 결심공판이 있기 전 이준구 사장과 박상일 주필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이들에 대한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졌고,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1970년에야 고소를 취하했다. 삼성그룹은 경향신문과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언론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삼분폭리 사건이 불거진 다음해 중앙일보를 창간, 동양방송(1965년 개국)과 함께 종합매스컴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중앙일보> 이어 <동양방송>까지 모기업 옹호 나서

아무튼 사카린밀수사건이 폭로되자 중앙일보는 삼성쪽 해명 논리를 연일 지면을 통해 쏟아냈다. 중앙일보는 9월16일자 3면에 「사카린 밀수보도 사실과 다르다」는 제목 아래 ‘직원 개인의 비행이다, 기재 도입에 부당 삽입, 즉각 적발 자진신고 했다, 이미 5월에 의법조치’ ‘불미한 행위 회사선 몰랐다’라고 보도했다.

다음 날에도 7면에서 당시 부산세관장의 말을 빌려 “정당절차 따라 처벌했다, 밀수품 아니며 내 책임하에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사설을 통해서도 “이번의 사카린원료 밀수 사건도 정확한 경위가 이미 관계기관에 의해 발표됐거니와 왜곡되거나 무분별한 흠이 없지 않은 세론이 비생산적이고 인심을 쓸모없이 자극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썼다.

당시 삼성그룹이 거느리고 있던 동양방송까지 모기업 옹호에 나섰다. TV의 경우 9월 18일 오전 9시30분 교양프로그램 <일요응접실>에 당시 신석초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김기두 서울대 교수 등을 출연시켜 비호방송을 내보냈고, 그날 저녁7시 <석양 속의 데이트>에서도 김승한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이 나와 삼성을 옹호했다. 라디오도 17, 18, 19일 아침 저녁으로 삼성을 감쌌다.

이런 태도는 「대재벌이 밀수를 했다-특혜밀수의 정치파장」 「국민 분노케 한 파렴치」(동아일보 9월 17일자) 등 다른 신문의 보도나 진상규명 요구 등 들끓었던 여론과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중앙일보는 온 국민이 분노하는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제쳐놓았다. 되레 날마다 지면을 통해 삼성직원 몇 명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에 불과하고 그에 따른 처벌도 받았기 때문에 다시 수사하는 것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삼성측 주장을 그대로 싣는 ‘사보’ 구실을 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박 전 대통령과 이병철 전 회장 공모

삼성그룹 비호 보도가 언론계와 독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자 박정희 대통령이 9월 21일 재벌과 언론기업이 완전 분리하도록 지시해서 법제처가 경영과 편집의 분리, 신문과 방송의 겸업 금지 등을 뼈대로 한 언론공익법을 성안하기까지 했다. 대통령까지 나서자 당시 이병철 한국비료사장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고 언론과 학원에서도 손을 떼겠다고 다짐했다.

대검찰청은 9월 24일 이병철 사장 차남인 한국비료 이창희 상무 등을 구속하고 10월 6일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마무리지었다. 이에 대해 신문들은 「국민 기만한 각본수사 이병철씨 무혐의는 모순 당착」(동아일보 10월 7일자 3면)이라고 비판하고, ‘사카린 밀수는 빙산의 일각이고 건설자재란 명목으로 세탁기 양변기 전화기 텔레비전도 밀수했다’고 보도했으나 검찰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이로부터 23년이 지난 1993년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병철 회장의 맏아들 맹희씨는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병철 당시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이 적극 감싼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 밀수였다고 주장했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 지휘했다고 밝힌 맹희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65년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사건이 마무리된 지 3년 뒤 1969년 2월 14일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 임직원들에게 “정치적으로 누군가가 작용을 많이 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며 "우리 중앙일보가 미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앙일보가 너무나 빨리 발전되는 바람에 다른 신문은 모두 그것을 시기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진기 부사장에게 물려진 <중앙일보>

이병철 중앙일보 사장은 창간 3년만인 1968년 홍진기 부사장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홍진기 사장은 이후 중앙일보 회장을 역임했으며 1986년 7월 13일 작고했다. 고 이병철 회장의 3남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홍진기 전 회장의 장녀 홍라희 여사가 결혼, 두 집안은 사돈이 됐다. 홍석현 대사는 홍 전 회장의 장남으로 이건희 회장과는 처남-매부 사이가 된다. 홍 대사는 1986년 삼성코닝 상무를 지낸 ‘삼성맨’이며 이건희 회장도 1968년 중앙일보 이사를 역임했다.

홍진기 전 회장의 삶은 우리 현대사를 기술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일제 때인 1940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법조계에 투신, 1943년 전주지방법원 판사가 됐고 1945년 사법요원양성소 교수를 거쳐 1949년 대검찰청 검사를 지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의 법무부 장관을 거쳐 4.19혁명 때 내무부 장관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발포명령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사형구형을 받았으나, 선고된 형은 징역 9개월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됐고 나중에 특사로 풀려났다. 홍 전 회장은 이병철 전 회장과 사돈을 맺으면서 1965년 동양방송 사장 취임과 함께 언론계에 투신, 신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홍진기 전 회장이 사장으로 들어선 뒤에도 중앙일보의 삼성그룹 비호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삼성그룹에 대한 공격은 당시 석간의 맞수였던 <동아일보>가 전면에 나섰다. 동아일보는 1976년 5월 10일 삼성재벌 산하 중앙개발이 개원한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입장료가 비싸고 시설을 제대로 마련돼 있지 못하다고 포문을 열고 자연농원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삼성그룹의 비리를 들추고 총수인 이병철 회장에게 화살을 겨누었다.

5월 17일자부터 시작된 시리즈 「용인자연농원의 내막」마지막회(6회)에서 동아일보는 “용인자연농원은 삼성이 내세우는 것처럼 국토 되찾기 운동의 실천장이라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결코 없다”며 “기간산업은 외면한 채 패밀리랜드(자연농원) 정문 앞에 사자상을 새겨놓은 이 명각의 허구와 위선, 용인농원의 숱한 비리는 과연 어떻게 심판될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어 6월 28일부터 시작된 제2의 시리즈 「땅의 애사」를 통해 삼성그룹의 땅투기 실상을 폭로했다. ‘재벌과 토지의 함수’, ‘토지매입의 방정식’, ‘연포의 비정’, ‘움켜쥔 대덕의 옥답’, ‘배신의 땅 안정리’, ‘돈에 짓밟힌 땅’ 등의 소제목을 통해 삼성그룹이 사들인 전국 각지 땅 매입의 문제점과 억지로 땅을 판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삼성그룹이나 중앙일보의 반격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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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78년 4월 15일자 기사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전쟁

동아일보의 집중적인 공격에 대해 삼성그룹과 중앙일보가 조직적인 반격을 보인 것은 1978년 일어난 ‘삼성조선 시추선 설계도 절취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4월 12일 대한조선공사 직원이 삼성조선 간부의 사주를 받아 석유시추선 설계도를 훔쳐낸 ‘산업스파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어 동아일보는 이틀 뒤 치안본부가 특별수사반을 부산으로 급파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는 같은 날짜에 동아일보의 기사를 부인하는 정반대의 내용을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조공(조선공사) 서류도난, 삼성조선과 관련 없다, 경찰 발표. 범인 장의 공명심이 빚은 단독 범행’이라는 기사로 삼성조선 간부가 관련된 듯 보이는 동아일보 보도내용을 부인하고 치안본부가 특별수사반을 보냈다는 기사를 지칭하여 “모 석간지의 보도는 전혀 근거없는 허위”라고 주장했다.

삼성그룹도 반격에 나서 4월 13일자 중앙일보 2면에 해명서를 싣고 이 사건의 보도가 동아일보의 왜곡 조작이며 특정회사를 헐뜯기 위한 감정에 치우친 보도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더욱 집요하게 사건을 파헤치자 삼성그룹은 다음날 중앙일보 1면에 게재한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동아일보 기사가 “허무맹랑한 내용을 고의로 날조 보도함으로써 여론을 오도하고 폐사를 헐뜯는 데 급급하고 있다”고 격앙된 어조로 동아일보를 비난했다. ‘삼성선박주식회사 임직원 일동’ 명의로 된 이 광고는 동아일보에 대한 삼성그룹의 정면반격을 선언한 것이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다음날(4월 15일) 이 사건이 크게 비화하여 삼성조선에 대한 전면수사로 번졌다며 「삼성조선 그 실상」 기획기사를 통해 삼성그룹이 조선업에 손대기까지 경위와 중공업에 진출하게 된 내막을 다뤘다. 삼성그룹은 같은 날 중앙일보에 세 번째 광고를 게재했다. 삼성측은 경찰당국이 이 사건을 단독범행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매듭지었음을 공식으로 밝혔다고 주장하고 동아일보가 시종 거짓보도를 일삼아왔다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제 악의와 중상과 허구의 보도로써 진실을 고의로 외면하고 국민의 이목을 현혹해 온 동아일보의 반사회적 누습(陋習)이 또 다시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최근 10년간만도 폐사관계 제사(諸社)에 대한 근거없는 비방기사를 무려 518건이나 다루었으며, 의도적인 과장보도와 논평까지 합치면 실로 700여건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계속 실추되고 있는 사세를 만회해 보겠다는 저의에서 앞으로도 더욱 더 반사회적, 반도의적인 비열한 수법으로 우리를 헐뜯는 데 발벗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가 계속 끈질기게 파헤쳤고 5월6일자 사회면 톱으로 검찰이 관련자 5명 구속 기소, 2명을 불구속 기소했다는 내용을 보도하고 「‘쥐꼬리’만 자른 ‘산업스파이’ 마무리」라는 해설기사로 사건수사와 결말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삼성-현대 1위다툼... <중앙일보> '현대' 집중공격

중앙일보는 재벌간의 싸움에서도 노골적으로 삼성편을 들어줌으로써 상대 재벌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80년 3월 당시 재벌그룹의 양대산맥이었던 삼성과 현대가 재계 1위를 놓고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여러 신문들은 재벌 양대산맥이 싸우게 된 원인과 배경, 두 재벌의 세력판도와 사업상의 특징과 경쟁 등을 기획기사와 가십 등으로 다루고 있었다.

신문들은 ‘제일주의’(삼성)와 ‘팽창주의’(현대)가 맞닥뜨린 수위다툼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삼성그룹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측은 3월 13일자 조간부터 중앙일보를 제외한 중앙일간지에 ‘해명서’를 광고로 게재했다.

“중앙매스콤(회장 이병철)의 사실과 다른 집중 과장보도에 대해 해명합니다”로 시작된 이 해명서는 중앙매스콤이 집중보도로 여론을 오도하여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을 뿐 아니라 해외공사 수주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현대가 이같이 광고를 통해 삼성그룹을 비난한 날 석간 중앙일보는 1면과 사회면에 현대가 맡은 공사의 부실을 크게 보도했다. 현대그룹은 이 사건에 대해 재벌이 언론기업을 소유하여 타기업에 타격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양 재벌의 싸움이 너무 커지자 일반의 여론도 비판적이었다. 두 재벌은 3월 17일 아침 정주영 현대 회장과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 삼성측에서는 홍진기 중앙매스컴 사장과 김덕실 동양방송 대표이사가 만나 중앙매스컴이 앞으로 공정한 보도를 하겠다고 약속했고, 현대는 이미 준비했던 2차 해명광고를 신문에 내지 않기로 해서 싸움은 일단 끝났다.

삼성과 현대가 전면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삼성에게 불리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창 개헌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언론계에서는 언론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경영과 편집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불거졌다. 당연히 재벌과 언론의 분리, 언론기업의 독과점문제가 거론됐다.

재벌과 언론의 분리 문제는 60년대 사카린밀수 사건 때부터 여론화했던 문제인 만큼 삼성으로서는 신중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됐다. 중앙일보는 사보를 통해 미디어기업의 집중화에 대한 외국 실태를 특집으로 다뤘다. 신문과 방송의 겸영 등 미디어기업의 집중이 세계적 추세라는 주장이었다. 최근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해야 한다는 중앙일보의 주장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97년 계열분리.. 그러나 삼성과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더욱 곤란한 문제는 용인자연농원 양돈장에서 흘러나온 돼지분뇨가 서울 등 수도권 주민의 식수원에 버려진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보도된 것. 공교롭게도 삼성과 현대가 일단 휴전할 것을 약속한 바로 다음날인 3월 19일자 동아일보가 터뜨렸다. 3만여마리의 자연농원 돼지분뇨를 팔당댐 수원인 경안천에 흘려보내 식수원을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인근 농경지에도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보도에 삼성그룹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가 1976년 처음 자연농원 문제를 보도했을 때나 1978년 삼성조선 스파이 사건을 폭로했을 때 다른 신문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소극적으로 보도했다. 따라서 동아일보와 삼성그룹 또는 중앙일보간의 문제로 비쳐졌으나 이번에는 서울시민 건강과 직결된 환경오염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신문들도 다투어 크게 취급했다.

용인자연농원 오염사건을 보도한 신문별 보도빈도 및 크기 등을 종합해 보면 동아일보는 훨씬 잦은 빈도로 많은 지면을 배정하고 사진을 게재했던 데 비해 중앙일보는 가장 적은 양을 게재하여 대조를 이뤘다. 동아일보는 4건의 사진을 게재했던 데 비해 중앙일보는 한 건도 싣지 않았으며, 동아일보가 모두 23건을 보도한 데 비해 중앙일보는 5회밖에 다루지 않았다. 다른 신문들은 10회 이상 다뤘다.

특히 중앙일보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끝면(8면)에 작게 취급했을 뿐이다. 더구나 중앙일보는 모든 기사를 스트레이트 형태로만 취급하고 논설이나 만평, 독자투고, 가십 같은 형태로는 아예 다루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이라는 특정한 이익집단에 의한 영향에서 독립해 공정한 보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앙매스컴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에 의해 동양방송(TBC)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1986년 홍진기 회장 작고 이후 장남인 홍석현 사장이 뒤를 이었다. 중앙일보는 이번에 불거진 'X파일' 대화록이 녹음된 1997년 당시 삼성그룹과 분리되지 않아 지분구조는 홍석현 23%, 이건희 20.3%, 삼성물산·삼성전기·제일모직 13%, 제일제당 14.8%였다.

중앙일보는 1999년 4월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됐다. 이건희 회장 지분도 고 홍진기 회장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유민문화재단으로 이전됐다. 현재 지분구조는 홍석현 주미대사 36.79%, 제일제당 및 계열사 33%, 유민문화재단 19.99% 등이다. 그러나 표면상 분리됐다 하더라도 최대주주 홍 대사가 삼성그룹과 인척관계이고 2대주주 제일제당도 '삼성패밀리'이기 때문에 삼성그룹과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주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