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약식 ‘바보론’

olddj 2009. 7. 11. 16:00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소설.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시계줄을 사고,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빗을 산다.

참, 바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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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란 자기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선천적인 기질과 후천적인 운명이나 환경에 좌우되는 것.

하지만 자기자신이 ‘바보’로 불리워지기를 원한 사람들이 있다.

1970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인근 재단사들을 모아 친목단체를 하나 만드는 데 그 회會의 이름이 ‘바보회’였다.

왜 ‘바보회’였을까? 일신상의 영일을 포기하면서 타자의 행복을 추구했다는 것에서 ‘바보’의 의미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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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김수환도 자기를 바보로 표현했다.



그의 일생에 약간 석연치 않은 부분을 강조하여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없지 않지만,

그가 없었다면, 그때의 명동성당이 없었다면 87년의 일도 없었으리라는 건 명약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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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보가 또 땅에 묻히었다. 어제.

그도 ‘바보’라 불리는 걸 아주 기꺼워했다고 한다.

그를 ‘바보’라 부르면서 우린 행복해 했다.

더 많이 울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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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근기’를 이야기한다.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나눈다.

“상근기자는 바보같이 어리석게 보이고 중근기자는 지혜롭게 보이고 하근기자는 똑똑하게 보인다.”고 하였다.

‘성자가 된 청소부’라는 책 제목이 있는 걸 보면 그 뜻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다.

전태일도 김수환도 노무현도 죽어 부처가 되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내가 상근기자 못됨이 아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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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자기합리화지만, 난 ‘바보’를 나에게 끼워 맟춘다.

‘바보’를 ‘바로보는’이란 뜻으로 새기고 싶은 것이다.

<바로보는 우리 역사>라는 책이 있었는데, 흔히 줄여 <바보사>라고 했다.

불교에 ‘팔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첫번째가 ‘정견’이다.

정견이 없다면 나머지 일곱 개는 없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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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은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고 김대중은 말한다.

어찌 보면 이 ‘행동하는 양심’이 바보의 지표가 되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난 상근기자가 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운명적으로 바보처럼 살 수도 없고 지혜롭게 살 자신도 없다.

하지만 똑똑하게는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바보로는 살지 않겠지만(못하겠지만),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늘 생각하며 살야야겠다는 것이다.

‘담벼락에 대고 욕을 하는’ 최소한의 행동은 해야겠다는 다짐에 다름 아니다.

‘하근기자’의 최대한은 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