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왕조의 몰락과 종부세

olddj 2008. 11. 18. 01:24

이준구 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교과서를 바꿔 쓰라는 말인가?"에 아래의 문장이 나온다.

"바람직한 조세제도가 가져야 할 성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모든 경제학자가 한 입이 되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세부담의 공평한 분배’다. 조세부담이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공평하지 못한 조세부담이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숱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조세부담의 공평한 분배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이준구 홈페이지 "교과서를 바꿔 쓰란 말인가?"

다들 아시겠지만 프랑스 혁명에 관한 예가 빠질 수 없다.

......18세기 말,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소요와 혼란이 일어났다. 시민과 농민들이 지배계급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저항의 움직임이 가장 거센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 부유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상류층과 일반 민중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여기에는 부유층에 대해서는 세금을 거의 면제해주고 세 부담을 빈곤층에게 전가하는 불공평한 조세제도가 한 몫을 했다. 국가 재정은 엄청난 군비 지출과 호화로운 궁정 생활로 인해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시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루이 16세는 늘 그랬듯이 조세 인상을 계획하고,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미년에 방지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삼부회는 1614년 이후 한 번도 소집된 적이 없는 신분 대표 회의로서, 루이 16세는 여기서 조세 인상에 대한 동의를 받아내고자 했다. 제 1신분인 성직자 계급과 제 2신분인 귀족 계급은 삼부회에 각각 300명의 대표를 참석시켰다. 제 3신분을 이루는 시민과 농민은 전 국민의 9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과의 오랜 협상 끝에 겨우 600명의 대표를 내보낼 수 있었다. 삼부회의 첫 회의에서 당장 논란거리가 된 것은 표결에 있어서 세 신분 집단에게 동등한 결정권을 부여할 것인가[각주:1], 아니면 참석한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결정권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제 3신분과 몇몇 하위 성직자 및 귀족들은 개인별 표결을 요구했지만, 루이 16세는 이를 거부하고 신분별 회의와 표결을 명령하였다. 제 3신분 대표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성직자 시에예스가 쓴 팸풀릿「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였다. 이글에서 시에예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2. 국가 질서 속에서 제 3신분은 무엇이었나?
   아무 것도 아니었다.
3. 제 3신분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 질서 내에서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세계사> 중 '왕의 종에서 국가의 주인으로'의 일부 (만프레트 마이 지음, 김태환 옮김) 웅진, 2004

눈에 파박 꽂히는 숫자가 있다. 98퍼센트...!

과거 우리나라에 있었던 민란이나 현대의 시위나 소요사태들도 경제 문제와 결합하면 그 파급력이 커졌다. 즉 소득분배의 악화, 양극화의 심화, 계급적 불평등 따위가 정치적 격변의 한 원인이 되고, 거기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공평과세의 문제인 것이다.

엊그제도 글에 인용했던 <애절량>의 일부를 다시 옮겨 본다. 애절량이 무슨 뜻인 지는 다 아실테니 넘어가고... 참으로 처절한 저항 아닌가...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진관현]: 부호들은 일년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粒米寸帛無所捐[입미정백무소연]: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똑같은 백성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다산 7언시.애절양(哀絶陽) 中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내세운 명분은 민주화였다. 유신체제를 공고히 한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것. 시위대는 경찰서, 도청, 방송국 등 주요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강력한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가 방화(放火)한 공공건물 중 '세무서'도 끼어 있었다.
시위대가 세무서에 불을 놓은 것은 단순히 정부시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977년 시행된 신(新)세제(지금은 국가 기간세제로 자리잡은), 부가가치세에 대한 저항, 즉 '조세저항'의 표출이었다.

조세일보 2006년07월03일 "부가세가 10.26사건 낳았다(?)"

부마민주항쟁에 있어 세금의 문제는 (왕조는 아니었지만) 독재정권의 우두머리가 사라지게 한 여러 요인 중 간접적인 원인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민주당이 부가세를 낮추자는 감세안을 지속 요구하는 것도 부마항쟁에 그 역사적 맥락이 조금은 맞닿아 있는 지 모른다.

올해 일어난 유혈사태 중 티베트 시위도 경제적 요인과 뗄 수 없다. 그 중에 격렬한 저항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는 바로 경제적 불평등이다.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이고, 국가나 정치집단이 특정 집단에 대한 이익을 대변할 때 더욱 과격해지는 것이다.
티베트의 경우 한족이 상권을 장악하여 개발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한다. 그로 인해 빈부 격차는 더 심해졌다.

뭐, 정권의 몰락까지야 가지 않았지만(않겠지만), 유혈 진압으로 인해 중국은 엄청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받고 있다).

이준구는 그의 글 말미에 아래와 같은 경고와 우려를 적고 있다.

이번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공평한 과세를 가로막는 대못 하나가 빠졌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오해다. 실제로 그 결정은 우리 조세제도의 허약한 공평성의 뼈대를 간신히 지켜주던 큰 기둥 하나를 뽑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헌재의 결정은 우리 사회와 경제에 거센 회오리바람을 몰고 올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 큰 혼란만은 없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이준구 홈페이지 "교과서를 바꿔 쓰란 말인가?"

앞에 예를 든 프랑스 혁명 당시,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시민과 농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떨까? 좀 어거지로 끼워 맞추면, 제 1계급이 판관 계급, 제 2계급은 2% 계급, 제 3계급은 (미네르바가 말하는) 천민 계급이 아닐까?

국회에서 종부세법 개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냐에 따라 18세기 말의 프랑스와의 다시 한 번 비교해 봄직하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큰 혼란만은 없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1.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미국의 winner-take-all인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