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잡담

타자연습..광교

olddj 2008. 11. 13. 17:56

독타로 분당 160타 정도 나오던데, 하루 30분~1시간 씩 보름 넘어 연습했는데도 겨우 150타 정도 나온다. 처음 컴퓨터를 접했을 때 정식으로 할 건데 이제와서 습관을 바꾸려니 참 힘이 든다.

늘 연습하는 글(어린왕자, 메밀꽃..무렵, 애국가 따위)이 식상해서 임종국 선생 ('친일문학론'을 쓰고 '민족문화연구소'를 만드신..) 이 쓴 책 <한국사회풍속야사>(서문문고, 1980)에서 재밌는 글 하나를 골라 쳐 보았다. 책을 보고 치려니 타자연습 프로그램에서 치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다.

아무튼 빨리 속도가 좀 붙었으면 좋겠다. ㅠㅠ


조선시대 여인들의 사랑과 가교(架橋)
공원도 다방도 없던 시절에 데이트는 어디에서 했을까? 물방앗간이 아니면 다리목이다. 그러니까 고수(鼓手) 한성준(韓成俊)의 하룻밤 애절한 사랑에도 다리는 예외 없이 등장하였다.
‘내일 오정 때쯤 해서 광교 다리목으로 오세요.’
 
이리하여 서로가 가슴을 조이게 마련인 그 사랑은 이미 1년 전에 비롯하였다. 단오날 공연을 마치고 막 연흥사(演興社) 문을 나서는데 문득 여인이 다가서는 것이었다.
“아니!”
장옷으로 얼굴을 감쌌으니까 고운지 미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까이 스칠 때 코에 향기롭던 여인의 내음. 떠맡기듯이 보자기 하나를 쥐어 주더니 여인은 사라지고 보자기에는 얌전하게 누벼진 밀통사 조끼가 들어 있었다. 여름인데, 철늦은 조끼가 더워 보여서 주는가 보다 하고 한성준은 고맙게 생각했다.
이로부터 한 달에 두 번씩 여인의 정성은 지극하였다. 철따라 가려서 보내는 옷이 여름에는 모시 항라 적삼에 두루마기 보선 행전까지 세심하게 챙겨 보냈다. 그런데 옷을 가져다주는 여인이 실은 심부름만 하는 사람 같았다. 그 곁에는 그 많은 날 공연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여인이 있었다. 원래 장옷이란 갑이나 을이나가 같은 모양에 같은 디자인이다. 그런데 그 여인의 장옷은 끈이 드물게 남색이라 요행히 구별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약 1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장의 메모가 전달되었다.
‘내일 오정 때쯤 해서 광교 다리목으로 오세요.’
아닌 것처럼 걸음을 옮기는 뒤를 밟아서 한성준은 수구문(水口門) 밖 어느 초가집 안방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아름답고 귀골로 생긴 여인이 하나. 그가 바로 1년씩이나 철 찾아 옷을 선물하던 배후의 주인공이었다. 겸상으로 들여진 음식에는 숫제 숟갈도 못 대고, 그동안 여인의 정성이 뼈에 사무쳐서, 한성준은 덥석 손목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 마디를 나누지 못하는 두 사람……. 석양에 대문을 나서자니 심부름하던 여인이 말하는 것이었다.
“내일 오정 그 시간에 광교 그 자리로 오세요.”
이리하여 두 번째 앉아 보는 그 방에서 두 사람의 정염은 끓어올랐다. 스스러움은 어제 하루의 대면에서 가셔졌다. 드디어 서로를 가누지 못해 잠자리를 같이 한 두 사람. 격한 끝이라 남자의 그 어떤 동작에도 여인은 항거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작별하고 대문을 나서자니까 안내하던 여인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오시지 말라는 군요, 그럼 안녕히… ….”
이후 그 여인은 한성준의 공연에 다시 나타나는 적이 없었다. 이리하여 도깨비한테 홀린 것처럼 단 한 번 정사로 그쳐버린 1년 이상의 말 못할 사랑. 아마 그런 정사를 계속하기에는 그 무렵의 사회의 제약이 너무 가혹했던 탓이 아닐까? 갑술생(甲戌生)인 한성준이 32세 때 있었던, 즉 1915년의 로맨스 1막이었다. 그 무렵 광교를 비롯한 다리는 내외법에 얽매인 연인들이. 비밀리에 만나는 약속 장소로서 오래도록 편리한 존재였다.
임종국 <한국사회풍속야사>, 서문문고, 1980

오늘날의 광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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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 낮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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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 밤모습


http://tv.seoul.go.kr/livecam/seoulall/cgc/openv2.asp

썰렁하기 그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