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유감

월간중앙-시사IN, 조선일보-한겨레, 조계종 총무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olddj 2007. 11. 3. 09:50
2005년 <월간중앙>의 굴욕

<월간중앙>은 2005년 8월호에 조선시대 스님과 양반들의 성문화를 소개한 모 교수의 기고를 실었다. 9월호에는 '조계종 4대 의혹을 캔다'는 기사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자금, 불교박물관 건축 비리 등을 지적한다.
8월호 기사에는 별 반응이 없던 조계종은 9월호가 발매되자마자 8월 기사와 함께 싸잡아 심하게 반발한다. (불교계, <월간중앙> 비리의혹 보도에 반발)

<월간중앙>쪽은 '기사가 잘못이 없다'며 '차라리 법적으로 해결하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조계종에서는 '불교탄압'이라 하고  <월간중앙>은 '언론탄압'이라고 주장이 평행선을 그리는 가운데, 조계종의 규탄대회와 천막농성이 이어진다.[각주:1]

그러던 중 돌연(?)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 이장규는 8월29일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을 찾아가 사과문을 전달하고 사태를 매듭짓는다. (월간중앙, 조계종에 사과문 전달)

이는 6월호, 7월호에 이은 세번째 굴욕(?)이었다. 6월호나 7월호에서 <월간중앙>은 '권력(청와대)'에는 굴복하지 않았지만, '자본(홍석현, 삼성)'에는 '항복'한 바 있다.

8,9월호 사태에서 <월간중앙>이 '종교권력'에 굴복한 것인지, '자본권력'에 굴복한 것인지 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언론이 스스로의 자존을 세우지 못하고 그 무엇과 타협했다는 점에서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종교기관은 성역인가/성한표 , ‘월간중앙-조계종’ 사태 유감, 조계종 - 월간중앙 갈등의 내막)


2007년 <조선일보>의 굴욕


<조선일보>와 일전불사를 외치던 조계종은 방상훈의 사과 방문으로 구독거부 운동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럴려고 조선일보와 싸우자고 했나")

조계종이 구독거부 운동을 결기있게 추진하자, 곧바로 '빨아주는(?)' 기사를 냄으로써 교태를 부리더니 결국 사장이 찾아가서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된 것이다. 하긴 구독 거부 서명자가 3만이라고 하니 수그리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위 링크한 기사에도 그런 내용이 있지만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는 '사과' 기사가 아니다. 사태를 봉합하려는 정치적 수사만이 가득하다. 내용으로 보건대, 앞으로 당분간은 <조선일보>에서 조계종 비판기사를 보기는 힘들 것 같다.[각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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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비교해야 할 지 난감하여...

지난 달 조계종이 <조선일보>구독 거부 운동을 시작할 즈음 블로그에 글을 쓰다가 말았다. '스님들의 결기'를 칭송하고 격려하는 내용이었는데, 쓰다 만 이유는 2005년의 <월간중앙>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당시 스님들의 행동은 이타행이었을까 이기행이었을까? 아무튼 언론과 정치적 타협으로 그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그리고 침묵이었다. 이번에도 그 결기라는 것이 보잘 것없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과연, 쓰지 않기를 잘했다.

2일 조계종 총무원 보도자료 내용 중에 이런 구절들이 있다.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각종 언론비평 프로그램과 언론단체들은 언론의 책임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평가하는 여론과 보도가 잇따라 진행되었다"

"조선일보 구독거부 운동은 한국 종교사 뿐만 아니라 언론사적으로 보더라도 유례가 없었던 일로서 우리사회의 큰 관심을 일으켰으며,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으로 내가 낯이 뜨거울 정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리 폭로가 이어지는 요즘이다.
<월간중앙><조선일보>와 <시사in><한겨레>를 비교해 본다. 조계종 총무원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비교해 본다. 도무지 어떻게 비교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십 수 년 전 읽었던 소설의 내용이 생각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옮겨 본다.

따지고 들자면 율장(律藏) 사분률(四分律)에는 5종불남 5종불녀(五種不男 五種不女)가 있다. 그 가운데서 칼로 남근을 잘라버린 남자는 수도승의 자격을 잃는 것이다. ...... 이런 사람을 건불남(犍不男)이라 하는데 이와 함께 생불남(生不男)도 있다. 그것은 태어난 이래 남근 구실을 하지 못하거나 남근이 발육되지 않은 상태의 남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부처가 되는 길에 이런 종류의 성 장애자는 부처가 되는 힘으로서의 정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이 될 수 없고 선방의 본참(本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 점은 아마 다른 종교의 수도승들도 첫 입문에서 그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과 상통하는 것인가. ......

고은 자전소설 <나, 고은> 권3, 138쪽, 민음사, 1993

나무관세음보살[각주:3]

관련 글 : 2007/08/18 - 국민의 알권리와 인권때문이라고?

  1.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한 승려는 "어차피 중앙과 삼성은 한 회사 아니냐"며 "이번 사태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사과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시민단체들과 연합해 이건희 회장의 집으로 찾아가 농성을 벌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미디어오늘, 2005. 8.26) [본문으로]
  2. 예전에도  종교를 비판하는 기사는 그리 많지 않았고, 있더라도 그 강도는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겨레>조차도 종교에 관한 기사는 몹시 조심스럽다. <조선일보>는 다만 신정아와 변양균을  조지다 보니 엉뚱한 소스를 덜컥 물었지 싶다. 실수 또는 오버한 것이지. 그래서 좀 억울할런지도.^^ [본문으로]
  3. 나는 나이롱끼 많은 불교도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