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애민정신과 시대정신

olddj 2009. 9. 1. 05:57
 명진스님의 눈물

명진스님이 천일기도를 마치고 용산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 “이명박 정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정권 대통령, 서민놀이 그만두고 용산부터 와보시라” – 오마이뉴스).

두 번 눈물을 보였고, 개인적으로 모은(신도들이 모아준)  1억원을 전달했으며, 유가족들을 보듬어 주었다.  ‘거리에서 만날 얻어터지는’ 신부님들께 죄송하다고도 했다. 그는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법문을 천일동안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스님이 갖는 애민정신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뭉클하다.

지도자의 애민정신

정토원 49재 때 이병완 전 실장의 강연을 들을 때다. 그저 담담히 듣고 있다가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을 인용할 때 눈물이 왈칵 솟았다. 강연이 끝날 때까지도 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열혈 노무현 지지자인 내가 그의 임기 초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캐치프레이즈성 문구려니 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을 보내는 의식인 49재에서 그 말을 들으니 어찌 그리 가슴에 와닿던지…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낱말 조합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는 정말 이 나라 백성을 사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가.  그는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일기에서도 그랬고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그가 즐겨쓰는 휘호가  ‘사인여천’ ‘경천애인’이었다는 것도 그가 얼마만큼 ‘애민’하였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그 삶을 관통하는 단어가 ‘애민정신’이 아닐까 싶다.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큰 뜻에서부터 소소한 생활습관까지도 그 단어를 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늘상 연설 첫 머리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여러분”이라고 했다.

 



애민하면 위민한다

왕조시대에도 가뭄이 들거나 해서 흉년이면  임금이 식사를 한 끼 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정약용의 ‘애절량’을 보면 그가 백성들의 고통에 얼마나 안타까와 했는 지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호치민이 늘 보았다는 ‘목민심서’ 같은 저술이 있었다. 경주 최부자댁은 어떤가. ‘사방 백리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게 가훈이었다지.

요즘세상에서는 꼭히 크게 알려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부귀명성과 관계없이 이웃을 위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장훈이나 문근영도 그렇고 익명으로 동사무소에 쌀 가마를 배달시키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백성들(이웃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한다. 용산 신부님들이나 앞서 명진스님과 같은 성직자들은 소외받는 자의 아픔을 함께하고 기도한다.  네티즌들은 블로그 글이나 게시판 글로, 평범한 시민들도 집회에 참석하여 쪽수를 보태거나 일인시위에 나서기도 한다. 담벼락에 대고 욕을 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행동의 기저에는 애민의식이 있고, 약간 더 비약해서 얘기하면 이는 김대중 노무현이 말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나 깨어있는 시민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현 집권세력의 애민정신은?

그럼 정치가나 행정가, 판관들이 애민정신을 실천하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각종 정책과 민의 수렴 여부,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 의지, 법의 공정한 집행 따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위 말하는 이런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쉽게 이야기해서 대통령과 한 통속인 ‘집권세력’이라고 하자)은 과연 얼마나 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올해 일어난 일들만 보더라도, 용산참사를 대하는 현 집권세력의 태도를 보면 그 수준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 뿐이랴. 쌍용 사태 해결에서 보여준 태도, 비정규직법안의 개정을 시도했던 모습, 미디어악법을 통과시키는 어거지를 보자하면 참으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집권세력들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예를 들자하면 너무 많아서 언뜻 생각나는 것만 추려서 그렇다. 그러면서 ‘개인재단’을 ‘공익재단’이나 ‘기부’로 포장하고, 시장할머니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는 쑈를 연출하고 ‘미디어법이 민생법안이다’라고 사기치고 억지부리는 모습은  너무 어설퍼서 차라리 측은할 지경이다. 이것도 예를 들자면 너무 많아 극히 일부분만 적는다. 단언컨대 이 정권에 애민정신은 ‘없다’.

어제의 청와대 인사만 보더라도 그렇다. 강만수가 화려한 복귀를 했다는 건 무엇을 뜻하나? 참여연대의 말마따나 진보 보수를 따지지 않고 강만수의 행태에 반대했던 것이 엊그제 같다. 위장전입으로 장관자리를 내놓아야 했고, 휴일에 골프 쳤다고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몇 해 전을 기억한다면, 참으로 후안무치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노무현을 수사했던 검사들과 pd수첩을 수사하던 검사들이 줄줄이 영전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들은 애민정신은 고사하고 ‘양심’도 없음에 틀림없다는 확신마저 드는 것이다.

애민정신과 시대정신

김영삼은 유신정권 말기 YH농성장에 들러 지지와 위로를 전했다. 지금의 김영삼에 대한 평가야 어떨 지라도 당시에는 분명 애민정신의 실천이었다. 노무현은 변호사, 국회의원 시절 수많은 노동현장과 법정에서 서민대중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성취했다. 김대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독재시대의 정치가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믿고 있다. 개인적 의견으로, 용산사태의 해결없이 야권의 미래는 없다. 앞서의 명진스님이나 김대중 일기를 보면 명징하지 않는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민주당 의원 전원이 그 현장을 찾아 유족들을 위로 격려하고 함께 농성하면 어떨까? 애민정신의 실천이다.

김부겸은 <프레시안>인터뷰에서 김대중의 예를 들어  “결국 국민들은 시대정신을 가진 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김대중이나 노무현의 그 탁월한 현실인식과 시대정신이 애민정신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결국 ‘애민정신’이란 절대적 가치이고 시대정신은 상대적 가치인 것이다.

기업가는 이익을 추구하지만 정치가는 가치를 추구한다고 노무현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민주당은 당사에 두 분의 사진만 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야 한다.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이 추구하던 절대적 가치를 생각하면 상대적 가치인 시대정신은 저절로 읽어지지 않을까. 그리 함으로써 국민들은 ‘기회를 주는’ 것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