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태평성대에 관하여

olddj 2009. 8. 25. 04:01
 요 임금의 격앙가를 논하지 않더라도, 신경 쓸 일 이 하나라도 줄어드는 게 태평성대의 본질일지라.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전쟁이나 난리의 위협에서 백성들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런가.

김대중은 라면 사재기 열풍과 같은 현상이 없어졌음을 들어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가 멀어졌음을 자랑스러워하였다. 노무현은 기본 인식에서 이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615와 1004의 성과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노무현이 김정일을 만나고 온 직후에 지지율이 겁나게 상승했던 것은 참으로 국민들의 생각을 알게 해 주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과거 김대중 때도 마찬가지고.

기본적으로 919나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단속적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위협을 가한 것은 미국 네오콘세력과 일본 극우세력, 우리나라 뉴라이트 계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반도, 특히 남한의 태평성대를 훼방하는 세력들이다. 따지고 보면 한 줌도 안된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1999년에서 2000년 사이, 난 아는 사람들에게 ‘태평성대’를 이야기하곤 했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이 서로 부닥쳐도 서로 대화나 타협의 여지는 남길 줄 알았고, 이해의 공간을 넓게하는  여유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리더를 중심으로 한  운신의 공간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는 노무현 정권에서 더 넓어지고 커졌다.  경험에 의하면 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들부터가 자신이 가지는 조정기능에 보람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경청하고 토론을 할 줄 알았으며, 적절한 중간 지점을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았다. 정치보복을 모르는 우리 순둥이 초대, 2대 대통령 덕에 난 나름의 태평성대를 족히 누렸다.

두 대통령의 서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우리에게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가.

앞으로의 태평성대는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에 달려 있다.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되는 이명박이 숟가락 얹기를 주저하는 모습에서, 난 우리의 할 일을 본다. 지금은 요순시대가 아니다.

‘의식이 풍족해야 예의를 안다’고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 명제는 틀렸다. 그 대우인 ‘예의를 알면 의식이 풍족하다’라는 명제가 참이지 않기 때문이다.

(추기 2009. 8. 25 13:00) 앗, ‘의식이 풍족하면 예의를 안다’의 대우는 ‘예의를 모르는 놈은 의식이 풍족하지 않다’이다. 내가 말하려한 의미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