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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미디어포커스] 중앙일보와 일본우익(vod 및 대본)

olddj 2007. 4. 1. 10:19
<세지마 류조 기사 나카소네·야스히로 칼럼
일본 극우파에 손 내민 중앙일보의 속내는?>
중앙일보는 지난 26일 박태준 전 총리와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 상사 회장 사이에 이뤄진 대담 기사를 실었고 앞서 지난 18일 일요일판에는 미국과 특별한 관계 속에 동아시아의 협력을 강조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의 칼럼도 선보였다. 일본 내 극우파 인물들이 어떻게 한국의 중앙 일간지에 버젓이 등장할 수 있었는지 배경을 살펴보고 우리 언론의 역사 인식에 문제는 없는지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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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비평]② 중앙일보와 일본 우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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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중앙일보의 기사 (그림파일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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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원로 공통언어는 `먹고사는 전략` [중앙일보]
`포철 신화` 박태준, `전후 일본 번영 책사` 세지마 류조를 만나다

"한국에 가는 건 저의 마지막 남은 열망…열망이에요."

"다시 한번 일어나, 걸어서 저와 함께 한국에 가시지요."

95세와 80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와 박태준의 만남엔 절도와 우정,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20일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상사 회장
자택을 찾은 박태준 전 총리(右)가 투병
중인 세지마의 두 손을 꼭 잡고 감회에
젖어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두 사람의 만남은 '샌드위치 코리아'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중앙일보가 기획했다. 박 전 총리는 본지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세지마를 방문했다.

20일 오후 벚꽃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도쿄 외곽 조후(調布)시의 한적한 주택가.

나지막한 2층 집 문간방은 세지마가 걸어 온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대본영 제국' '격동 쇼와(昭和)사' '일본 전략 연구' '양명학' 등 그의 역정을 보여주는 역사서와 전략서가 가득 찼다.

또 다른 벽의 붙박이 진열대엔 세지마가 히로히토(裕仁) 쇼와 일왕한테 받은 각종 훈장과 서훈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빛 바랜 시트가 깔린 침대와 옆에 놓인 휠체어.

은빛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노인 세지마는 조금 전 침대에서 휠체어로 막 옮겨져 있었다. 명석한 두뇌와 승부사 기질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그였지만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말하는 중간 중간 고개를 숙였으며 문장을 이어 말하기가 힘겨운 모습이었다. 박 전 총리와 나눈 20분 대화에서도 생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 같았다.

세월은 가도 젊었을 때의 군인정신은 살아있는 걸까. 세지마는 혼신의 힘을 다해 팔을 올려 절도 있게 경례했다. 박 전 총리도 깍듯한 경례로 응대했다.

두 사람이 자주 쓰는 공통 언어는 국가, 전략, 동아시아, '먹고사는' 같은 말이다.

박 전 총리가 "요새 북한 문제가 조금씩 풀리고 있어요 "라고 하자 세지마는 "으응, 왜?"라고 관심을 표시했다.

박 전 총리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하고 있고, 북한도 모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니까요. 중국도 (안 풀리면) 큰일이고요"라고 설명했다.

박 전 총리는 2004년 여름 세지마와 두 시간가량 만났던 때를 회상했다. 그때 세지마는 "우리 오래 삽시다. 한.일 간에 벌어지는 안 좋은 일들을 우리가 해결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 전 총리는 '한국 침략에 대한 아베 총리의 어정쩡한 입장'에 대해 묻자 "그들 젊은 극우파들은 한국민이 갖는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해할 능력도 없다"며 "세지마 선생 같은 사람들은 평생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일들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걸 자주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0년 '밀사 세지마'의 역할을 얘기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일왕의 과거사 반성 표현 수위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란이 됐다. 일본 정부에선 쇼와 일왕이 84년 9월 밝힌 "유감이다"란 표현을 답습하자는 주장이 우세했지만 세지마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일본 외무성이 전혀 눈치 못 채게 한국과 일본을 오갔다. 그의 막후 조정으로 그해 왕위를 계승한 아키히토(明仁) 현 일왕은 "통석의 염을 금할 길 없다"는 진일보한 표현을 내놓았다고 한다.

도쿄=전영기 정치부문 데스크, 김현기 특파원


'주식회사 일본' 만든 막후 실력자
세지마 류조는


세지마 류조는 전후 일본이 구 일본제국군대의 조직을 본떠 일본 종합상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불모지대'(1976년, 신조사)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다. 이 소설은 최근 인기 드라마 '하얀 거탑'의 원작자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82)의 대표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2등,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세지마는 대본영(大本營.전시 최고통수기관) 육군부 작전과 주임을 거쳐 1945년 7월 만주 주둔 관동군 참모가 됐지만 "힘든 싸움"이라며 일본의 확전에 반대했다. 전선에서 소련군에 붙잡힌 그는 11년간 시베리아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 44세에 귀국했다.

세지마는 '상사맨'으로 전향했다. 47세 때 이토추(伊藤忠)상사 항공기부 차장이 됐고 그 뒤 군수사업, 석유사업, 세계적인 전략적 제휴 사업에 뛰어들어 그때마다 성공했다. 20년 만에 회장 자리에 올라섰다. 전성기 때의 세지마는 이토추 외에도 89개의 직함이 있었다.

이런 인맥과 실전 경험이 그가 국가 경영의 막후 전략가가 된 자원이었다.

60년대엔 '일본 주식회사'를 만들었고, 70년대 들어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한국의 정.재계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82년 1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90) 총리가 취임한 뒤 한.일 교과서 문제가 터졌다. 이를 계기로 세지마는 한국을 비밀리에 두 차례 찾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박태준.권익현씨를 만났다. 전후 일본 총리로선 최초로 한국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경제협력 자금 40억 달러를 한국에 지급하는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당시 만찬에서 나카소네 총리가 전체의 3분의 1을 한국어로 연설한 것이나 2차 뒤풀이에서 한국어로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독창한 것도 세지마의 연출이었다고 한다.

세지마는 이후에도 일본전신전화공사(NTT) 민영화 개혁작업을 총괄 지휘하는 한편 나카소네, 다케시타(竹下) 정권에서 행정개혁과 교육개혁의 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그의 전략가적 사고는 일본 경제 정책의 정신이 됐다. 다음은 80년대 그의 발언의 한 토막이다.

"앞으로 큰 방향성은 '태평양의 시대'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8억t의 원자재를 수입해 그것을 8000만t의 제품으로 가공해 수출해서 살아가는 나라다. 따라서 일본의 생존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세계가 평화롭게 안정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도로 교육받은 인재가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생존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정책은 그 어떤 것도 허황된 것일 뿐이다."

그는 지난해까지 일본 내 민간 전문가들이 설립한 '일본전략연구 포럼'의 회장을 맡으며 국가 전략을 설파했다.

'일본 우익세력의 정신적 지주''흑막 속의 실력자'라는 어두운 평가도 있지만 그가 '일본 번영의 책사'였던 건 분명하다.

도쿄=김현기 특파원